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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햇볕' 일관된 통일 정책···끝내 못이룬 통일의 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통일을 향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의 통일정책은 1970년대 야당지도자 때부터 주장해온 '남북연합→연방제→통일국가'를 골자로 하는 3단계 통일론으로 압축된다. 남북정상회의를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연합을 첫 단계로 한반도 평화분위기가 성숙하면 연방제를 만든 뒤 통일국가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그의 통일론이 빛을 발한 것은 대통령에 취임한 1998년 이후였다. 당선 직후 북한의 도발 불용 등 대북 3원칙을 천명하면서 햇볕정책을 과감하게 실천으로 옮긴 것. 그의 통일정책은 재임기간에도 북한 잠수정 침투와 금강산 관광객 억류 제1연평해전 등으로 난관에 봉착했지만 대북포용 정책 기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0년 3월 남북간 협력 수준을 민간에서 정부로 진전시키겠다는 베를린 선언을 하고 그해 6월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꿈에나 그리던 이산가족상봉과 금강산관광도 실현됐다. 이 공로로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햇볕정책은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에도 계승.발전되면서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퇴임 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직전 현대가 4억달러 정부가 1억달러를 북측에 몰래 건넨 사실이 밝혀진 데 이어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이 뒤따르면서 그의 햇볕정책과 통일론은 빛이 바랜 채 미완의 숙제로 남게 됐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협력·경쟁 넘나들며 애증의 반세기

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 시대가 막을 내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명이자 정계 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1960년대 이후 3김은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하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냉혹한 정치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친 뒤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경쟁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암흑기를 맞게 된다.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DJ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YS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힘은 3김에게 다시 정치활동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이다. DJ와 YS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나란히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하지만 이듬해 1988년 4월 총선에서 DJ(평민당)와 YS(통일민주당) JP(신민주공화당)는 각각 호남 영남 충청의 표를 결집시키면서 지역감정에 기반한 여소야대의 구도를 만들었다. 1990년 YS와 JP는 집권여당과 합당하는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에 참여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YS는 여당의 대권후보를 꿈꾸고 있었고 JP는 내각제 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배를 탄 것이다. 하지만 DJ는 민자당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합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됐고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의 대통령 당선으로 3김 정치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YS와 JP는 집권여당인 민자당 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으로 협력관계를 맺었지만 JP는 1995년 YS 민주계의 퇴진 압력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한 뒤 같은해 3월 충청기반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DJ도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역시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15대 총선은 3김이 맞붙은 또 한번의 승부였다. YS가 이끄는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은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139석을 얻는데 그쳤고 DJ의 국민회의는 79석 JP의 자민련은 50석을 확보했다. YS에게 쫓겨난 JP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나 DJP 공조도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9월 JP는 내각제 개헌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DJP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이후 2002년 16대 대선에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고 DJ는 전직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서 정계를 물러났다. 3김은 격동의 한국 정치사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지만 지역주의와 보스정치 금권정치라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3김 정치의 공과는 이제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지만 아직도 우리의 정치지형은 3김이 만든 지역주의의 견고한 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폐렴으로 입원 한달여만에, 외신들 긴급 타전

김대중(85) 대한민국 제15대 전 대통령이 한국시간 18일 오후 1시 43분(LA시간 17일 오후 9시43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한달 넘게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오후 1시35분쯤 한때 심장 박동이 정지된 뒤 1시40분쯤 회복했지만 다시 심장 박동이 멈춰 서거했다. 병원 측은 "맥박 호흡 혈압 등 생체활동 지수가 급격히 저하됐고 인공호흡과 전기충격 등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며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심장이 멎었다"고 밝혔다. 임종은 부인 이희호 여사와 김홍일홍업홍걸씨 3형제 등 가족과 측근들이 지켜본 것으로 알려졌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1998. 2~2003. 2)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중 IMF(국제통화기금)외환위기를 극복하고2000년6월 평양을 방문해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공로로 그해 12월 한국인으론 처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우리 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김 전 대통령 연보

1948-1950 목포일보 사장 1951- 흥국해운 사장 1951.9-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 1957.10-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1960.10-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 1961 제5대 민의원(인제) 1963- 제6대 국회의원(전남 목포) 1965- 민중당 대변인 1967- 제7대 국회의원(전남 목포) 1970- 신민당 대통령후보 1971.4- 제7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71-1972 제8대 국회의원(전국) 1974.11- 민족회복 국민회의 참여 1976-1978 3.1 민주구국선언사건 주도로 구속 1979.3-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1983-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설 1983.5- 미국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1983-하바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1985-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7.4-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19870- 평화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 1987-1991 평화민주당 총재 1987 평화민주당 대통령후보선출 1987- 제13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88-1992 제13대 국회의원(전국) 1991- 신민주연합과의 통합으로 신민당 창당 1991-1992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 1992 제14대 국회의원(전국) 1992.6-12 민주당 당무위원 1992 제14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93.12-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 1993 영국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 1994-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 아태평화재단으로 변경 1995-1998/2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1995-2001/11 국민회의 새천년 민주당 총재 1995-1997 아.태민주지도자회의 공동의장 1997.12.18 제15대 대통령 당선 1998.2.25 제15대 대통령 취임 2000.6.13 남북 정상회담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각 당 반응은···

"위대한 지도자 잃어" ◇한나라당=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윤상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김 전 대통령께서는 일생 민주화와 인권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오셨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윤 대변인은 또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께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하며 국민과 함께 슬픔을 나눈다"면서 "생전에 이루고자 하셨던 숭고한 뜻이 국민 화합과 남북간 평화로 승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대의 스승이었다" ◇ 민주당= "당신은 진정한 이 시대의 위대한 스승이셨다"면서 "비통하고 원통하다"고 애도했다. 노영민 대변인은 논평에서 "서슬퍼런 독재의 서슬에 굴하지 않았고 경제 파탄도 거뜬히 넘어오신 당신 반세기 갈라진 채 원수로 살아온 민족이 한 동포임을 알게 해 준 당신을 보낼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다"면서 "아직도 국민들은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대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은 슬픔이 아직도 크기만 한데 당신마저 가시다니 2009년은 잔인한 한 해"라며 "편안히 가시라"고 조의를 표했다. "후대가 업적 기억할 것" ◇자유선진당 등 기타 야권=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순탄치 않았던 정치역경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셨던 김 전 대통령은 끝까지 왕성한 노익장을 보여주셨다"며 "고인이 남긴 많은 족적과 업적들은 후대의 역사가 바르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도 논평에서 "시대의 큰 별이 졌다"며 "한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의 화해협력에 크나큰 족적을 남기신 지도자이자 큰 어른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겨레와 함께 슬퍼하고 애도한다"고 밝혔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인은 "평생을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이바지한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국민들과 함께 깊은 조의를 표한다"며 "고인의 서거를 통해 남북관계와 민주주의 발전에 하나의 큰 교훈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LA인맥은? 인권연·호남향우회와 '끈끈'

김대중 전 대통령의 LA인맥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인권연)'에서 찾을 수 있다. 인권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3 미국 망명시절 창설한 단체로 미국 전역에 지부를 열고 DJ지원을 하던 단체였다. 이 단체와의 인연으로 이후 DJ의 분신이 되었던 박지원도 있었고 정동채도 있었고 많은 인사들이 있었다. 인권연.호남향우회 등을 매개로 김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LA인사는 총 4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대다수가 지난 80년대 초 김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의 박해로 미국으로 쫓겨와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부터 끈끈하게 연락을 취해왔다. 우선 대표적 인물이 지난 97년 대선 당시 미주후원회 회장을 맡았던 최희만 전 LA노인복지국 커미셔너와 부회장을 맡은 안명식 전 이북5도민회장이 있다. 또 한국인권문제연 소장을 역임했던 강대인씨(치과의)의 경우 상임고문으로 대선 당시 LA지회를 총지휘했다. 이밖에 윤창기씨(남가주 천주교 평신도협회장) 신영균씨(사업) 권중규씨(치과의)등이 부회장단으로 김무찬씨(사업가)가 이사장으로 당시 후원회를 이끌었다. 김 전 대통령 후원에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LA지회장 김용현씨 이사장 배연원씨(USC)를 중심으로 언론인 김기옥씨 이선주씨 차종환 박사 김인자 변호사 등도 힘을 보탰다. 황제선 전 LA한인회장 조풍언씨 이종원씨 이정씨 정기진씨 오봉균씨 오세봉씨 정제진씨 에드워드 구 호남향우회장 빌 송씨도 지지에 앞장섰다. 이들외에 '가락회'의 마유진 회장도 주요 인맥으로 분류된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큰 별이 졌다'···한인들도 애도 물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에 LA도 함께 울었다. 특히 김 전 대통령과 오랜 세월 인연을 이어온 LA인사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의 LA방문은 대통령 당선 이후인 98년 6월12일이 마지막이다. 이희호 여사는 2002년 1월 삼남 김홍걸씨 간병차 LA를 찾은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목포상고 후배인 김용철 호남향우회 전 이사장은 "호남의 아니 대한민국의 큰 별이 졌다"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또 이순형 LA호남향우회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은 대학 시절이었던 80년대 민주화의 정신적인 축이었다"며 "돌아가실 것 같은 느낌은 들었지만 막상 뉴스를 접하고 나서는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미주후원회장이었던 최희만씨는 "한국 민주화를 이룬 역사적인 인물"이라며 "비록 햇볕 정책이 비난을 받았지만 남북평화 외교 정책을 시행한 분은 오직 김 전 대통령 뿐"이라고 평가했다. 신영균 한국어 진흥 재단 전 이사장은 "남다른 건강을 과시했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믿기지 않는다"면서 "당시 남북문제는 햇볕 정책이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높였다. 한편 LA총영사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처럼 영사관내 빈소를 마련할 예정이다. 김성진 부총영사는 "현재 정부에서 애도를 표했고 유가족과 장례 절차를 합의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협의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노 전대통령 당시와 비슷한 수준으로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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